제1장 상식에 대한 만행
“유럽 국민국가의 몰락과 반유대주의 운동의 성장의 동시성, 민족별로 조직된 유럽의 몰락과 유대인 말살의 우연적 일치—유대인 말살은 여론의 지지를 위한 투쟁에서 반유대주의가 경쟁하던 모든 주의에게 승리를 거둠으로써 이미 그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반유대주의의 원천에 관해 많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근대의 반유대주의는 국민국가의 발전이라는 보다 일반적인 틀 속에서 고찰되어야 하며, 동시에 반유대주의의 원천은 유대인 역사의 몇 가지 측면에서, 특히 지난 세기 동안 유대인이 수행했던 역할에서 찾아야만 한다. 국민국가가 분열하는 과정의 마지막 단계에서 반유대주의 슬로건들이 제국주의를 확대하고 낡은 지배 형태를 파괴하도록 대중을 부추기고 조직화하는 데 가장 효과적인 수단으로 입증되었다면, 유대인과 국가가 맺었던 관계의 역사는 사회 집단과 유대인 간의 적대감이 고조된 이유에 대해 중요한 단서를 제공할 것이다.” (1권 p.93)
제2장 유대인, 국민국가 그리고 반유대주의의 발생
1. 해방의 이중성과 유대인 국립은행가
“17세기 후반부가 시작되면서 유례없는 규모의 국가 부채에 대한 수요가 발생했고 경제적, 상업적 이해관계에서 국가가 차지하는 영역이 새로운 규모로 확장되었다. 반면 유럽인 가운데 국가에 돈을 빌려주거나 국가사업의 확장에 적극 참여할 수 있을 정도로 준비가 된 집단은 전혀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유대인이, 채권자로서 오랜 연륜을 쌓았고 유럽 귀족들의 재정 문제를 해결해주면서 그 대가로 종종 그들이 지역적 보호를 얻어내는 식으로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왔기 때문에 도움을 요청받은 것은 자연스럽다.” (1권 p.96)
“19세기 동안 유럽의 국민국가 체제가 승인한 유대인 해방은 이중적 기원을 가지고 있으며 언제나 이중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유대인 해방은 한편으로는 오로지 정치적, 법적 평등이라는 조건에서만 운용될 수 있던 새로운 정치 통일체의 정치적 법적 구조에 기인한다. …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유대인에게만 주어진 특권의 명백한 결과였다. 이 특권은 처음에는 몇몇 개인에게 주어졌다가, 나중에는 부유층 유대인의 소집단으로 확대되었다. 이 제한된 집단이 자신들만의 힘으로는 국가 경제의 수요 증가에 대처할 수 없게 되었을 때, 비로소 이 특권은 서부 및 중부 유럽의 전체 유대인에게 확대 적용되었다.” (1권 p.96)
“모든 국민에게 평등한 조건을 보장한다는 것은 새로운 정치 통일체의 전제 조건이 된다. 이런 평등이 실제로 과거의 통치 계급에게서 통치 특권을 박탈하고 과거의 피지배 계급에게서 보호받을 수 있는 권리를 박탈하는 정도로까지 실시되면서, 이 과정은 계급 사회의 탄생과 시기적으로 일치하게 된다. … 이런 보편적 법칙의 유일한 예외는 유대인이었다. 그들은 그들만의 계급을 구성하지 못했고 그들이 살고 있는 나라에서 어떤 계급에도 소속되지 않았다. 집단으로서 유대인은 노동자도 중산층도 지주도 농민도 아니었다. … 달리 말하면 그들의 지위를 규정한 것은 유대인이라는 사실이었지, 다른 계급과의 관계가 아니었다. 국가로부터의 특별한 비호와 그들이 국가를 위해 수행했던 특별한 업무로 인해 그들은 계급제도 안으로 흡수되지 않았을 뿐더러 하나의 계급으로 정착하지도 못했다." (1권 pp.97-98)
“유대인을 특수 집단으로 유지한 채 계급 사회로의 동화를 막고자 했던 국가의 이해관계가 자기 보존과 집단의 생존이라는 유대인의 이해와 일치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 결국 공식적인 유대인 정책은, 우리가 단지 그 마지막 결과만을 고려할 때 믿게 되는 것처럼 항상 일관성을 유지하지도 않았고 확고부동하지도 않았다. … 사회에서 유대인으로 태어난다는 사실은 한편으로 국가의 특별한 보호 아래 지나친 특권을 가진다는 것을 의미했고, 다른 한편으로 유대인의 동화를 막기 위해 그들에게 허락되지 않았던 특정한 권리와 기회의 결여를 의미했다.” (1권 pp.99-100)
“유럽 국민국가와 유럽 유대인이 함께 겪었던 부상과 몰락의 도식적인 윤곽은 대략 다음의 단계를 밟았다.
1. 17세기와 18세기에는 절대 왕정의 보호 아래 국민국가의 점진적 발전이 목격된다. 개별적인 유대인들이 … 궁정 유대인으로 부상하여, 국가사업을 재정적으로 지원하고 그들이 모시던 제후들의 재정적 거래를 처리했다. …
2. 유럽 대륙 전역의 정치적 조건에 급격한 변화를 가져온 프랑스 혁명이 일어난 뒤, 근대적 의미의 국민국가가 출현한다. 이 국민국가의 사업상 거래는 제후가 궁정 유대인들에게 요구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자본과 신용대부를 필요로 한다. … 이로써 이 시기에는 그때까지 궁정 유대인들에게만 주어졌던 특권이 좀더 넓은 범위의 부유층, 즉 18세기에 주요한 도시와 재정 중심지에 정착할 수 있던 이들에게로 확산되었다. 마침내 모든 성숙한 국민국가에서 해방이 보장되었다. …
3. 국가의 정부와 유대인들 사이에 존재하는 이런 밀착 관계는 일반적인 측면에서 부르주아의 정치 무관심과, 특수하게는 국가 재정에 대한 무관심에 기인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 시기는 19세기 말, 즉 확장의 형태로 이루어지는 자본주의적 사업이 국가의 적극적인 정치적 지원과 간섭 없이는 더 이상 수행될 수 없게 되었던 제국주의의 등장과 함께 끝난다. … 유대인들은 국가사업에서의 독점적 위치를 제국주의적 성향의 사업가들에게 빼앗기고 만다. …
4. 집단으로 보면 서구 유대인은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 수십 년 동안 국민국가와 함께 해체의 길을 걸어왔다. … 제국주의 시대에 유대인의 부는 그 중요성을 상실했던 것이다. 국가들 간에 권력의 균형 감각이나 유대성이 없던 유럽에서 범유럽적 유대인이란 요소는 그들의 무익한 부로 인해 일반적인 증오의 대상이 되었고, 권력의 결여로 인해 경멸의 대상이 되었다.” (1권 pp.100-102)
“국가와 사회 사이에 고조되는 긴장을 완전히 무시했던 유대인은 마찬가지로 상황이 자신들을 갈등의 중심부로 몰고 간다는 사실을 가장 뒤늦게 알아차렸다. 따라서 그들은 반유대주의를 어떻게 평가해야 할지 몰랐고 사회적 차별이나 편견이 정치적 논점으로 변모하는 시점도 인지하지 못했다. 반유대주의는 100여 년 동안 점진적으로 거의 모든 유럽 국가의 거의 모든 사회 계층으로 퍼져갔고 결국 다른 문제에서는 절망적으로 분열되어 있던 여론을 하룻밤 사이에 일치시킬 수 있는 이슈로 갑자기 부상했던 것이다. 이 과정의 발전 법칙은 간단하다. 국가를 대변하는 것처럼 보이는 유일한 사회집단은 바로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국가 자체와 갈등에 빠지게 된 사회 계급은 반유대적이 된다.” (1권 p.116)
2. 초기의 반유대주의
“반유대주의가 처음으로 활활 타오른 곳은 1807년 나폴레옹에게 패배한 직후의 프로이센이었다. … 유대인 해방은, 프로이센이 당시 가난한 유대인 주민이 많이 살고 있던 동부 유럽 지방을 잃었던 관계로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는 사안이었다. 1812년의 해방 칙령은 이미 시민권을 누리고 있었고 일반적인 특권 폐지로 인해 시민적 지위에 심각한 손실을 입게 될 부유하고 쓸모 있는 유대인 집단에게만 해당되었다. … 개혁가들의 태도에서 그리고 특히 1812년의 해방 칙령에서 유대인에 대한 국가의 특수한 이해관계가 기이한 방식으로 표출되고 있다.” (1권 pp.122-124)
“가장 큰 타격을 받은 계급인 귀족의 격렬한 반응 가운데 하나가 전혀 예기치 못한 반유대주의의 폭발이다. … 경제적인 관계나 사회적 친밀성도 귀족이 평등주의적인 국민국가에 공공연히 반대하는 상황의 심각성을 덜어주지 못했다. 사회적으로 국가에 대한 공격에서 유대인을 정부와 동일시했다. … 그런데 귀족의 반유대주의는 단번에 어떤 정치적 의미가 없는 온건한 차별로 돌변했다. 동시에 보수주의는 낭만주의 지식인들의 도움으로 정치 이데올로기의 하나로서 발전의 정점에 이르게 된다. 이 이데올로기는 독일에서 극히 특이하고 교묘한 방식으로 유대인에 대해 이중적이고 애매모호한 태도를 취한다. 그때부터 국민국가는 보수적 논점으로 무장하고, 쓰임새 있는 유대인과 그렇지 못한 유대인을 구분하는 선을 긋는다.” (1권 pp.125-127)
“이렇게 하여 권력을 가진 유대인과 국가 사이에 이해관계의 완벽한 조화가 이루어진다. 부유한 유대인은 다른 유대인 동포에 대한 통제권과 비유대계 사회로부터의 격리를 원했고 이를 얻었다. 국가는 부유한 유대인을 위한 선심성 정책을 유대계 지식인에 대한 법적 차별 및 사회적 고립의 촉진과 결합시킬 수 있었다.” (1권 p.129)
“귀족의 반유대주의는 신성동맹이 지속된 수십 년 동안 아무런 정치적 결과도 없이 빠른 속도로 진정되었던 반면, … 메테르니히의 경찰 정권에 대한 자유주의자들의 대항과 반동적인 프로이센 정부에 대한 신랄한 공격은 순식간에 반유대주의적 정서의 폭발과 반유대주의적 소책자들의 범람으로 이어진다. … 그들의 주된 관심사는 평등한 기회였고 또 자신들이 공직에 기용될 수 있는 기회를 제한하는 귀족적 특권의 부활에 가장 분개했기 때문에, ‘우리 동포’로서의 개별적 유대인과 집단으로서의 유대 민족의 구분을 토론에 도입했다. 이 구분은 그때부터 좌파적 반유대주의의 트레이드마크가 된다.” (1권 p.129)
“오스트리아와 프랑스에서는 그렇지 않았지만, 프로이센에서 이 과격한 반유대주의는 과거 귀족의 반유대주의처럼 생명이 길지 못했고 효과도 미미했다. 그것은 점차 경제적으로 성장하고 있던 중산층의 자유주의 안으로 흡수된다.” (1권 p.130)
3. 최초의 반유대주의 정당들
“19세기의 마지막 20여 년 동안 반유대주의가 독일과 오스트리아, 프랑스에서 동시에 하나의 심각한 근본 요소로 등장하기에 앞서 일련의 금융 스캔들과 사기 사건이 발생했다. … 당초 약속한 이윤 대신 엄청난 손실을 안겨준 이 기이한 투자 사기 사건에 연루된 집단이 귀족, 정부 관료, 유대인 외에 또 있었다. 주로 하위 중산층으로 구성된 이 집단이 갑자기 반유대적으로 돌변한 것이다. 이들의 피해는 다른 어느 집단보다 심각했다. … 이 하류 중산 계급인 프티 부르주아는 … 자신들의 불행을 맨체스터 체계 탓으로 돌렸다. 즉 이 체계가 자신들을 경쟁 사회의 고통에 노출시켰고 당국이 보장하던 특별한 보호와 특권을 박탈했다는 것이다. … 유대인을 “극단으로 흐른 맨체스터의 응용체계”의 대변자로 생각한다는 것은, 진리와는 멀어도 한참 먼 생각이었지만, 거의 당연한 일이었다.” (1권 pp.132-133)
“정부 지원을 기대했거나 기적이 일어나리라 믿었던 사람들이 은행가들의 다소 수상쩍은 도움을 받아야만 했을 때 이런 적대담은 한층 더 강해진다. 소매상들에게는 은행가가 노동자를 착취하는 거대 기업주와 같은 존재로 보였다. … 소매상들은 … 노동자보다 더 심한 곤경에 처해 있었고, 경험을 토대로 은행가란 조용한 동업자로 만들 수밖에 없는 기생충이자 고리대금업자라고 생각했다. … 이런 은행가의 다수가 유대인이었다. 일반적인 은행가의 모습은 역사적 이유에서 거의 대부분 유대인의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이런 이유로 하류 중산 계급의 좌익 운동과 은행 자본에 대항하는 선전은 모두 반유대적으로 변했다. 이는 산업화된 독일에서는 그리 중대한 결과를 가져오지 않았지만, 프랑스에서는 엄청난 파장을, 오스트리아에서는 그보다 약한 정도의 파장을 몰고 왔다. 한동안 유대인은 처음으로 국가의 개입 없이 다른 계급과 직접적인 갈등에 빠진 것처럼 보였다.” (1권 pp.134-135)
“최초의 반유대주의 정당은 군소 정당이었지만, 곧 다른 정당과의 차별화에 성공한다. 그들은 자신이 정당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모든 정당들을 넘어서는’ 정당이라는 독창적인 주장을 한다. 계급과 정당으로 분열된 국민국가에서 이제까지는 국가와 정부만이 모든 계급과 정당 위에 서 있다고 또 전체 민족을 대표한다고 주장해왔다. … ‘모든 정당들 위에’ 서겠다는 반유대주의 정당의 주장은, 국가 전체의 대표가 되고 권력을 장악하며 국가 기구를 소유하고 국가를 대신하겠다는 의도를 분명하게 천명한 것이다.” (1권 p.136)
“새로운 반유대주의 정당이 지닌 두번째의 의미심장한 특징은 그들이 당시의 민족주의적 슬로건과는 대조적으로 또 이것과는 상관없이 유럽의 모든 반유대주의 집단을 통합하는 초국가적 조직으로 출발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이런 초국가적 요소를 도입하면서 자신들의 목표가 국가에 대한 통치권만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했고, 한 단계 더 나아가 이미 ‘모든 국가 위에’ 서 있는 범유럽 정부를 구상하고 있다는 점을 명확히 밝혔다. 가히 혁명적인 이 두번째 요소는 기존 질서와의 근본적인 단절을 의미했다. … 그들의 목적은 모든 자생적인 국가 구조를 파괴할 지배적 상부 구조의 설립이었다. 그들은 자국의 체제를 전복할 준비를 하고 있을 때조차 과잉 민족주의적 발언에 몰두할 수 있었다. 종족 민족주의와 정복에 대한 과도한 열정은, 국민국가와 그 주권의 좁고 아담한 경계를 폭파할 수 있는 중요한 힘 가운데 하나였기 때문이다. 맹신적 애국주의의 선전이 효과적이면 효과적일수록, 민족적 구분 없는 권력의 보편적 독점과 폭력의 도구를 통해 위에서부터 통치할 수 있는 초국가적 구조의 필요성을 여론이 믿도록 설득하기가 그만큼 쉬워진다.” (1권 pp.138-141)
4. 좌파 반유대주의
“정치 운동으로서의 19세기 반유대주의를 가장 잘 연구할 수 있는 곳은 반유대주의가 거의 10년간 정치적 풍경을 좌우한 프랑스이다. 여론의 지지를 받기 위해 좀더 훌륭한 이데올로기와 경쟁하는 이데올로기적 힘으로서의 반유대주의는 오스트리아에서 가장 명료한 형태에 도달했다.” (1권 p.142)
“유대인이 국가 기구에서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한 곳은 오스트리아였다. … 국민국가에서 유대인이 국가와 특별한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사회의 다른 모든 계급과 구분되었듯이, 오스트리아에서도 합스부르크 왕가와 특별한 관계를 맺음으로써 다른 계급과 구분되었다. 국가와 공공연한 갈등을 빚었던 계급은 도처에서 반유대적이 되었듯이, 오스트리아에서도 영구적인 민족 분쟁에 얽혀 있을 뿐 아니라 군주제 자체에 반대했던 민족은 모두 유대인을 공격하는 것으로 투쟁을 시작한다. … 이런 투쟁 가운데 눈에 띄는 현상은, 국가에 대한 독일 민족의 적대감이 지속적으로 커졌다는 것이다. 적대감의 증가 속도는 독일 제국의 수립 이후 더 빨라졌으며, 1873년의 주식 공황 이후에는 반유대주의 슬로건의 유용성이 발견되었다.” (1권 pp.142-143)
“범게르만주의자들은 자기 나라와 정부에 충성하는 대신 드러내놓고 비스마르크 제국에 대한 충성을 고백했고, 그 결과가 국민의 신분은 국가와 영토와는 관계없는 것이라는 관념이다 …. 오스트리아의 이 운동은 정당으로서 권력을 잡는 것, 즉 정권 장악 이상을 노리고 있었다. 이 운동이 추구하는 목표는 중부 유럽을 가히 혁명적으로 재조직하여 오스트리아의 독일인이 독일의 독일인과 힘을 합하여 지배 민족이 되고 그 지역의 다른 민족은 오스트리아의 슬라브계 민족처럼 일종의 반 노예로 살게 만들겠다는 것이다. 오스트리아의 범게르만 운동은 제국주의와 유사하고 또 국민 개념에 근본적인 변화를 초래했기 때문에 우리는 이에 대한 토론을 뒤로 미룰 것이다. 적어도 그 결과를 놓고 볼 때 이 운동은 단순히 19세기의 예비 운동이 아니다. 그것은 어떤 반유대주의 운동보다도 금세기에 발생한 사건들의 진행 과정에 속한다.” (1권 pp.146-147)
“정반대의 경우가 프랑스의 반유대주의이다. 드레퓌스 사건은 이데올로기적 측면과 정치적 측면뿐 아니라 19세기 반유대주의가 함축한 모든 요소를 완전히 들춰내는 계기가 되었다. … 다른 한편으로 이 사건의 발발은 너무나 시기상조였기 때문에 19세기의 전형적인 이데올로기의 틀 안에 묶여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19세기의 이데올로기는 프랑스의 모든 정권과 정치적 위기를 겪고도 살아남았지만, 20세기의 정치적 조건에는 결코 들어맞지 않았다. … 프랑스의 반유대주의는 나치즘의 형성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했고, 다가올 재앙에 책임이 있는 어떤 역사적 요인이라기보다는 그 자체로서 더 큰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이 유익한 한계점의 주된 이유는 프랑스 반유대주의 정당이 국내 무대에서는 폭력적이었을 지 모르지만 초국가적 목표를 추구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1권 p.147)
5. 안전의 황금시대
“반유대주의 운동의 일시적인 소멸에서 제1차 세계대전 발발까지는 20년이라는 시간적 간격이 있을 뿐이다. 이 시기는 적절하게도 ‘안전의 황금시대’로 서술되는데, 그것은 이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 가운데 단지 소수만이 분명 시대에 뒤떨어진 정치 구조에 내재된 취약점을 느꼈기 때문이다. 비극적 파멸의 임박을 예시하는 모든 징후에도 불구하고 이 정치 구조는 화려한 거짓 광채로 번쩍거리면서, 불가해할 정도로 한결같이 완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1권 p.155)
“(독립적인 유대계 상인 계급의 증대와 유대계 지식인층의 탄생)은 결국은 전통과의 실질적 단절을 야기하고 지식인의 동화와 중부 및 서부 유럽 유대인의 중요 계층의 귀화를 초래한다. 정치적으로 그것은 이제 유대인이 국가의 보호로부터 벗어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같이 사는 시민들과 공동의 운명이라는 의식이 커진다는 것, 유대인을 범유럽적 요소로 만들었던 유대인 간의 유대와 결속이 느슨해진다는 것을 말해준다. 사회적으로 유대계 지식인은 비유대계 사회로의 집단적인 진출을 필요로 했고 원했던 최초의 사람들이다.” (1권 pp.157-158)
“사회로 진입하는 길을 찾는 과정에서 이 집단은 차별이 일반화된 19세기의 상황에서 예외적으로 사회 안으로 들어갈 수 있던 유대인 개인들이 정한 사회적 행동 유형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 그들은 탁월한 서평가, 비평가와 수집가가 되었고 유명한 것을 조직하는 사람이 되었다. … 역설적이게도 유대인 구성원의 동화와 귀화를 인정한 유일한 집단은 바로 이 국제 사회였다. … 주요 정치인과 정치 평론가는 유대인이 해방된 후 어느 때보다도 유대인 문제와 덜 씨름하게 되었고, 반유대주의가 공개적인 정치 무대에서 거의 완전히 사라지는 동안, 유대인은 그 자체 사교계의 상징이 되었고 사회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은 모든 사람에게는 증오의 대상이 되었다. 19세기 동안 반유대주의의 발전에 영향을 미쳤던 특수 조건이 없어짐으로써 그 토대를 상실한 반유대주의는 사기꾼과 미친 사람에 의해 다듬어져 반쪽 진리와 야만스러운 미신의 무시무시한 혼합물로 변한다. 그것은 1914년 이후 유럽에서 좌절과 분노로 가득 찬 모든 사람의 이데올로기로 나타난다." (1권 pp.158-159)
제3장 유대인과 사회
1. 버림받은 하층민과 벼락부자 사이에서
“유대인의 정치적, 경제적, 법적 평등이라는 현실에 직면한 사회는 어떤 계급도 유대인의 사회적 평등을 승인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점을 그리고 유대인 가운데에서도 오직 제한된 소수만을 수용할 의사를 분명히 표현했다. 예외적인 유대인이라는 이상한 찬사를 들었던 이 사람들은 사회가 문호를 개방한 까닭은 그들이 유대인이기는 하지만 유대인 같지 않다는 극히 모호한 사실 때문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 비유대인 사회가 요구한 것은 신참자는 자신들만큼 ‘교양 있어야’ 하며 또 그들이 ‘평범한 유대인’과 다르게 행동할지라도 결국 유대인이기 때문에 범상함에서 벗어난 특별한 것을 생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1권 pp.164-165)
“18세기에 이런 태도의 원천은 새로운 휴머니즘에 있었다. 새로운 휴머니즘은 분명한 어조로 “인류의 새 표본”(헤르더)을 원했고, 모든 유형의 인류와 친밀할 수 있다는 본보기를 제공할 사람들과의 교제를 원했다. 멘델스존 시대의 계몽된 베를린에서 유대인은 모든 사람이 인간임을 증명하는 산 증거의 역할을 했다. … 유대인은 멸시받는 피억압 민족이었기에 인간 존엄의 보다 완전한 표본이었다. … 인류의 근본적인 단일성을 열심히 강조했던 이들은 인간성이 보편적 원리임을 보다 효과적으로 증명하기 위해서 유대 민족의 기원이 실제보다 낯설고 따라서 더 이국적임을 보여주고자 했다.” (1권 pp.165-166)
“사회적으로 말하면, 프로이센에 남겨진 유대인은 자신들을 예외로 평가하게 했던 원래의 배경을 상실했던 것이다. 이제 그들은 스스로 그런 배경을 만들어야 했지만, 그것은 이미 축소된 배경이었고, 그 앞에서 두드러져 보이려면 개인은 두 배 이상 공을 들여야만 했다. ‘예외 유대인’은 다시 한번 그저 보통 유대인이 되었다. 그들은 업신여김을 당하는 민족과 따로 떨어진 예외가 아니라 민족의 대표자였던 것이다. … 바로 이것이 ‘예외 유대인’이 항상 두려워했던 일이었다.” (1권 pp.171-172)
“’일반 유대인’과 닮지 않으면서 여전히 유대인으로 남는다는 것, 다시 말해 유대인이 아닌 척 행동하면서 동시에 유대인임을 충분히 확실하게 보여준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벼락부자도 아니었고 “의식 있는 떠돌이 하층민”(베르나르 라자르)도 아니었던 평균적 유대인은, 아무런 내용 없이 자신들이 다르다는 사실만을 강조할 수밖에 없었다. … 부르주아 사회는 오락거리를 찾았고, 정상적인 인간과 특별한 개인에게 열렬한 관심을 보였다. … 계몽의 진정한 관용과 인간적인 모든 것에 대한 호기심은 이국적이고 비정상적이며 뭔가 다른 것을 좋아하는 병적인 취향으로 대체된다. … 시들해져 가는 사교계에서는 오로지 유대인 역할만이 사교계의 사건이라는 좁은 한계를 넘어서는 크기를 지닐 수 있었다.” (1권 pp.181-182)
2. 힘센 마법사
“(벤저민 디즈레일리는) 자신이 유대인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면 그 자신과 다른 사람에게 얼마나 더 흥미로울 것이며 자신의 출세에도 훨씬 더 유익할 수 있을 것인지를 깨달았던 것이다. 그는 높은, 더 높은 상류 사회로 진출할 수 있는 허가를 얻기 위해 다른 어떤 유대계 지식인보다 더 열심히, 더 뻔뻔스럽게 노력했다.” (1권 p.183)
“디즈레일리는 유대인이 처해 있는 실질적 조건에 무지했기 때문에 또 근대 공동체에 대한 유대 종족의 영향을 너무나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북구와 서구의 인종들로부터 모든 영예와 호의를 받아야 한다. 문명화되고 세련된 국가에서 이런 영예와 호의는, 일반 대중을 매혹시키고 감정을 고양시키는 사람의 몫이어야 한다”고 솔직하게 요구했다. … 한 평범한 민족의 정치적 야망을 잣대로 유대인의 가능성을 평가했던 디즈레일리의 능력이 가져온 정치적 결과는 더욱 심각했다. 우리가 좀더 악의적 형태의 반유대주의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 즉 유대인의 영향력과 조직에 관한 이론의 총 집합체를 그는 거의 자동적으로 생산했다. 무엇보다도 그는 스스로를 실제로 “선택된 민족의 선택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1권 p.187)
“유대계 지식인의 세속화와 동화는 옛 기억과 희망이 사라지고 선민의식만이 남는 식으로 그들의 자의식과 자기 해석 방식을 변질시켰다. 물론 디즈레일리가 선택하고 거절하는 신을 믿지 않으면서 그 자신이 선택받았음을 믿은 유일한 ‘예외 유대인’은 아니었지만, 그는 이 공허한 역사적 사명 개념에서 성숙한 인종 이론을 생산해낸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는 셈족의 원칙이 “우리의 천성 안에 있는 영적인 모든 것을 표현한다”고 단언할 자세가 되어 있었다. 또 “역사의 흥망성쇠는 종족이 전부라는 주요한 해법을 보여준다. 종족이란 ‘언어 종교’와 상관없는 ‘역사의 열쇠’라고 할 수 있다”고 단언할 자세가 되어 있었다. “인종을 만드는 것은 단 하나, 피”이기 때문이며, 세상에는 “일류 조직의 순수 인종”으로 구성된 “자연이 부여한 본성적 귀족”이 단 하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이론과 좀더 현대적인 인종 이데올로기의 밀접한 관계는 더 이상 강조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1권 p.191)
“유대인의 정치적 역할에 관한 디즈레일리의 관점은 아직 정치 경력이 전무한 단순한 작가였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 새로운 소설 <코닝스비>에서 그는 유럽 제국의 꿈을 포기하며 유대인의 자금이 궁정과 제국의 흥망성쇠를 결정하고 모든 외교 문제를 지배한다는 환상적인 기획을 전개한다. 그는 선택된 종족에서 또 선택된 사람들이 지닌 비밀스럽고 신비스러운 영향력이라는 이 두번째 생각을 일생 동안 포기한 적이 없었다. … 비밀결사가 함께 지키는 유대인 음모에 대한 믿음은 반유대주의를 널리 알리는 데 가장 탁월한 선전 효과가 있으며, … 그런데 디즈레일리가 정확하게 반대되는 목표를 위해 그리고 비밀결사를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던 시기에 동일한 결론에 도달했다는 것은 매우 시사하는 바가 크다.” (1권 pp.194-195)
3. 악과 범죄 사이에서
(이 부분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유대인에 관한 한, 유대교라는 ‘범죄’가 상류 사회에서 유행하는 유대인 기질이라는 ‘악덕’으로 전환한 것은 극히 위험했다. 유대인은 유대교를 피해 개종할 수 있었다. 그러나 유대인 기질로부터는 도피가 불가능했다. 더구나 범죄는 처벌받으면 되지만, 악덕은 박멸의 길밖에 없었다. 유대인 혈통에 대한 사회의 해석과 사회생활의 틀 안에서 유대인이 맡은 역할은 반유대주의 조치가 실행될 때의 파멸적인 철저성과 밀접하게 연관된다. 나치식의 반유대주의는 정치적 정황과 이런 사회적 조건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종족 개념은 더 직접적인 정치적 목적과 기능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것이 가장 악의적인 측면에서 유대인 문제에 적용되었고 또 성공을 거두었던 원인은 여론의 동의를 이끌어낸 사회 현상과 확신이었다. … 만약 우리가 반유대주의의 역사를 하나의 실체이자 단순한 정치 운동을 생각한다면, ‘일반 유대인’, ‘어디에나 있으며 아무데도 없는 유대인’에 대한 추적 열풍은 제대로 이해될 수 없다. 정치사나 경제사에서 설명하지 못하고 사건의 표면 아래 감추어진 사회적 요소를 역사가가 인식했던 적은 없다. 단지 시인이나 소설가의 예리하고 열정적인 힘에 의해 기록되었을 뿐이다. 만약 그대로 내버려두었다면 단순한 정치적 반유대주의가 걸어갔을 진로, 즉 반유대인 법령이나 대중의 폭발로 귀결되었을 뿐 결코 대량학살로 끝나지 않았을 그런 진로를 바꾼 것은 바로 이런 사회적 요소였다.” (1권 pp.213-214)
제4장 드레퓌스 사건
1. 사건의 진상
“드레퓌스 사건이 정치적 함의를 지니고 생존할 수 있던 것은, 이 사건의 두 요소가 지닌 의미가 20세기에 커졌기 때문이다. 첫째 요소는 유대인에 대한 증오였고, 둘째 요소는 공화정 자체, 즉 의회와 국가 기구에 대한 의혹이었다. 국민 대다수는 옳든 그르든 간에 국가가 여전히 유대인의 영향력과 유대계 은행의 권력 아래에 있다고 생각했다. 현재까지 반드레퓌스라는 용어는 반공화정, 반민주주의 그리고 반유대주의의 경향을 띠는 모든 것에 대한 공인된 명칭으로 사용된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이 용어는 악시옹 프랑세즈의 군주제에서 도리오의 민족 볼셰비즘과 데아의 사회적 파시즘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포괄했다. 그러나 제3공화국은 수적으로 중요하지 않았던 이런 파시스트 집단 때문에 멸망한 것은 아니다. 그 반대로, 역설적이지만 단순한 진리는 그들의 영향력이 공화정이 몰락할 당시만큼 미약했던 적은 없었다. 프랑스를 몰락의 길로 내몬 것은 더 이상 진정한 드레퓌스파가 없었기 때문이다. 즉, 민주주의와 자유, 평등과 정의가 공화정의 형태로 수호되고 실현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 없었다. 결국 공화국은 너무 익어버린 과일처럼, 항상 프랑스군의 요직을 차지했던 해묵은 반드레퓌스 도당의 품으로 떨어지고 만다.” (1권 pp.220-221)
“여기서 우리의 근본적인 관심사는 드레퓌스 사건의 정치적 방향이지 소송 사건의 법적 측면이 아니다. 그 속에서 분명한 윤곽으로 드러나는 것은 20세기를 특징짓는 일련의 재판이다. 20세기의 첫 수십 년 동안 거의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흐릿하고 희미했던 것이 드디어 대낮의 환한 빛 속에 드러났고 현대의 주요한 흐름에 속하는 것처럼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 드레퓌스 소송은 완전히 해결되지 못한 기이한 “범죄” 이상이며, 가짜 수염과 어두운 안경으로 위장한 참모본부 장교들이 파리의 밤거리에서 엉터리 위조 서류를 팔고 다니는 그런 사건 이상이다. 그 사건의 주인공은 드레퓌스가 아니라 클레망소였고, 시작은 한 유대인 장교의 체포가 아니라 파나마 스캔들이었다." (1권 pp.223-224)
2. 제3공화국과 프랑스 유대인
“파나마 회사가 도산했을 때 … 더 중대한 문제는 프랑스 중산층 50만 명의 파산이라는 사실이 몇 해 지나지 않아 드러났다. 언론과 의회의 조사 위원회는 파나마 회사가 몇 년 전부터 이미 파산상태였다는 동일한 결론에 도달한다. … 그는 신규 대출을 승인받기 위해 언론과 절반가량의 의원들, 그리고 모든 고위 공무원을 매수해야만 했다. … 죽기 직전 라이나흐는 프랑스 유대인에게 중요성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조치를 한 가지 취했다. 그는 에두아르 드뤼몽이 설립한 반유대주의 일간지 <리브스 파롤>에 뇌물을 받은 의원의 명단을 건네주면서 단 한 가지 조건을 달았는데, 그것은 이 사실을 폭로할 때 자신을 개인적으로 보호해 달라는 것이었다. … 드뤼몽의 신문 그리고 이와 함께 반유대주의 언론과 운동이 결국 제3공화국에서 가장 위험한 세력으로 등장했다. 드뤼몽의 표현에 따르면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만든 파나마 스캔들은 두 가지를 만천하에 폭로했다. 첫째 의원과 공무원이 사업가가 되었다는 사실이고, 둘째 사적인 사업과 국가 기관을 연결시켜준 중개인은 거의 유대인이었다는 사실이다.” (1권 pp.225-227)
“이미 부패할 대로 부패한 체제에 붙어사는 이 기생충들은 철저하게 타락한 사회에 극히 위험한 알리바이를 제공해주었다. 대중의 분노를 가라앉힐 필요가 있을 때, 유대인이었던 그들을 희생양으로 만들 수 있었던 것이다. 그 후에는 만사가 옛 방식대로 굴러갈 수 있었다. 반유대주의자는 유대인이 원래는 건강한 사람의 신체에 붙어 있는 흰개미에 불과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부패한 사회에 빌붙어 사는 유대인 기생충을 지목하면 됐다. 체제의 부패가 유대인의 도움 없이 시작되었다는 사실은 그들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 스스로를 애국자라 불렀던 반유대주의자는 자기 민족은 완전무결하다고 생각하고 다른 민족들은 맹렬하게 비난하는 것이 그 본질인 새로운 민족 감정을 소개했다.” (1권 p.230)
3. 공화국에 저항하는 군대와 성직자
“사회와 의회의 분파에는 누구나 가입할 수 있지만 구성원의 이동이 심해 충성심이 약했다. 이와 대조적으로 군대는 신분 사회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엄격한 배타성에 사로잡혀 있었다. 장교들을 단결시켜 공화제와 모든 민주 세력에 대항하는 반동의 보루를 구축하게 만든 것은, 군인 생활이나 직업에 대한 명예도 아니고 군인정신도 아니었다. 그것은 오로지 신분정신이었다. 국가가 군대를 민주화하고 시민권에 예속시키는 일을 포기함으로써 중대한 결과가 나타났다. 군대는 마치 국가의 외부 집단처럼 되었고, 그 충성이 어느 방향으로 전환될지 아무도 예견할 수 없는 그런 무장 권력이 생겨났다. … 그들의 악명 높은 왕정복고주의도 공화국 내에서 스스로를 하나의 독립적인 이해 집단으로 정립하기 위한, 즉 “공화국과는 상관없이, 공화국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공화국에 대항해서까지” 자신들의 특권을 지키기 위한 하나의 구실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1권 pp.232-233)
“어느 현대 사학자는 유대인과 예수회의 투쟁을 “두 경쟁자 간의 투쟁”으로 묘사하고 있다. 즉 “예수회 고위 성직자와 유대인의 금권정치가 프랑스 한복판에서 보이지 않는 전선처럼 서로 맞서 있다”는 것이다. 유대인은 예수회를 자신들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최초의 적수라 생각했고, 동시에 예수회는 반유대주의가 얼마나 강력한 무기인지를 즉각 깨달았다는 점에서 이 묘사는 타당하다고 할 수 있다. 바로 이것이 반유대주의라는 “중대한 정치적 개념”을 범유럽 차원에서 이용하려 했던 최초의 시도이자 히틀러보다 앞선 유일한 시도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투쟁이 평등한 두 ‘적수 간’의 싸움이었다는 가정은 명백히 잘못된 것이다. 유대인은 분열된 공화국의 다른 정파가 장악했던 것보다 더 높은 권력을 원하지 않았다. 당시 그들이 원한 것은 자신들의 사회적, 경제적 이해를 추구하는 데 충분한 영향력이었다. 그들은 국가 경영에서 일정한 정치적 지분을 열망하지 않았다. 이를 추구한 조직은 예수회뿐이었다.” (1권 pp.237-238)
“드레퓌스를 구제할 수 있는 근거는 단 하나였다. 부패한 의회의 음모, 붕괴중인 나라의 적나라한 부패, 성직자의 권력욕 등에 당당히 대처할 수 있는 것은 인권에 기반을 둔 자코뱅당의 엄밀한 국민 개념, 즉 클레망소의 말을 빌리면 한 사람의 인권 침해는 만인의 인권 침해라고 주장하는 공동체의 삶에 대한 공화주의 관점이었다. … 생제르맹 지역의 성직자와 귀족 가문을 위시하여 반교회적 경향의 급진 프티 부르주아 계급에 이르기까지 사회의 모든 상류 계급은 유대인을 정치 통일체에서 공식적으로 제거하기를 원했다. 그들은 이런 방식으로 오명을 씻고 자신들의 결백을 입증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유대인과 사회적, 정치적 접촉을 못한다 해도, 이는 충분히 감수할 만한 대가라고 생각했다. 마찬가지로 조레스 신문에서 언급했듯이, 의회는 드레퓌스 사건을 의회의 유서 깊은 청렴함을 회복할 수 있는, 정확하게는 다시 획득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보았다. 마지막으로, 그러나 중요성에서는 결코 뒤지지 않았던 이유는 ‘유대인에게 죽음을’이나 ‘프랑스는 프랑스인을 위해’ 같은 슬로건을 은근히 지지하는 과정에서, 대중과 현재의 정부 및 사회를 화해시킬 수 있는 마법 같은 공식이 발견되었던 것이다.” (1권 pp.241-242)
4. 국민과 폭민
“폭민은 일차적으로 각 계급의 낙오자들을 대표하는 집단이다. 이 때문에 폭민을 국민과 혼동하기 쉽다. 국민 역시 사회의 모든 계층을 아우르기 때문이다. 국민이 모든 혁명에서 진정한 대의제를 위해 투쟁했다면, 폭민은 항상 ‘강한 자’, ‘위대한 지도자’를 소리 높여 외친다. 폭민은 자신을 소외시킨 사회를 증오하며, 자신을 대변해주지 않는 의회 역시 증오하기 때문이다. … 제3공화국의 상류 사회와 정치가는 일련의 스캔들과 공적 사기를 통해 프랑스 폭민을 탄생시켰다. … 사회가 폭민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은 말로 그들을 보호하는 것뿐이었다.” (1권 pp.242-243)
“이 모든 사태에서 새로운 것은 폭민의 활동만이 아니었다. 선례는 넘칠 만큼 풍부했다. 그 당시 새롭고 놀라운 요소—모두가 우리에게는 너무나 낯익은 것들이지만—는 폭민의 조직, 그 지도자들이 만끽하던 영웅 숭배였다. 바레스, 모라스, 도데는 분명히 젊은 지식인 엘리트 집단이었으며, 폭민은 이들이 주장하던 ‘구체적인’ 민족주의의 직접적인 대리인이 되었다. 국민을 경멸한 이 엘리트 집단은 그 자체 근래의 파멸적이고 퇴폐적인 심미주의 예찬의 산물이다. 그런데 그들은 바로 폭민에게서 남성적이고 원시적인 ‘힘’의 생생한 표현을 발견했다. 최초로 폭민을 국민과 동일시했고 그 지도자를 민족적 영웅으로 전환시킨 것도 그들이고 그들의 이론이다. 곧 다가올 유럽 지식인층 붕괴의 최초 조짐이 바로 그들의 염세주의 철학과 파멸에 대한 기쁨이었다. 클레망소조차 폭민을 국민과 동일시하려는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특히 그로 하여금 이런 실수를 하게 만든 것은 ‘추상적인’ 정의의 문제에 대해 노동당이 시종일관 취했던 애매모호한 태도였다. 사회주의자를 포함하여 어떤 정당도 “문명인 사이에 어떤 일이 닥치든 정의를 위해 부서지지 않는 결속의 기반을 확립하기 위해” 정의 자체를 쟁점화할 준비는 되어 있지 않았다.” (1권 pp.250-251)
“클레망소는 이렇게 쓰고 있다. “국민의 공개적인 동의를 업고, 그들은 세상 앞에 자신들의 ‘민주주의’가 실패했음을 선언했다. 주권자인 국민은 자신들이 정의의 왕좌에서 밀려났음을, 확고한 위엄을 빼앗겼음을 그들을 통해 보여주었다. 왜냐하면 이 재난이 국민 자체와 공모하여 우리에게 닥쳤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 국민은 신이 아니다. 이 새로운 신이 어느 날 비틀거리면서 넘어지리라는 것은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집단적 독재자는 이 나라 구석구석에 널리 퍼져 있어 왕좌에 군림하는 단 한 사람의 독재자와 마찬가지로 흔쾌히 받아들일 수 없는 존재였다.” 클레망소는 마침내 한 사람의 권리 침해는 모든 사람의 권리 침해라는 사실을 조레스에게 납득시켰다. 그러나 그가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범죄자들이 혁명 이래 국민의 철천지원수인 귀족과 성직자였기 때문이었다. … 그들은 정의와 공화국의 명예뿐만 아니라 먼저 자신의 계급 ‘이익’이 위험에 처해 있음을 확신할 수밖에 없었다. … 적어도 부분적으로나마 이런 무관심한 분위기에서 노동자를 떼낸 최초의 인물은 국민의 열렬한 사랑을 받던 에밀 졸라였다. … 삶과 활동을 통해 국민을 ‘우상 숭배의 경계’ 지점까지 찬양했던 이 사람은 이런 용기를 가지고 대중에게 도전하고 투쟁하고 마침내 대중을 정복하기 위해 분연히 일어났던 것이다.” (1권 pp.252-253)
5. 유대인과 드레퓌스파
“드레퓌스를 전심전력으로 지원한 사람들이 프랑스 유대인 가운데 소수에 불과한 이유는 바로 이것이다. 피고인의 가족을 포함하여 유대인은 정치 투쟁을 겁내며 뒤로 물러났다. … 문제의 진실과 직면하기를 거부하던 드레퓌스는 재심을 포기하고 그 대신 온정적 조치를 청원하라는, 즉 유죄를 인정하는 방향으로 나가라는 권유를 받는다. 유대인들은 정치 전선에서 자신들을 상대로 전개되는 조직적 투쟁이 이 사건에 개입되어 있음을 보지 못했다. … 국가의 기초인 정의를 위한 클레망소의 투쟁에는 분명 유대인들에게 평등권을 되돌려주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 클레망소는 현대 유대인이 알고 있던 몇 안 되는 진정한 친구 가운데 하나였다. 그는 유대인이 유럽의 피압박 민족 가운데 하나라는 사실을 전 세계 앞에서 인정하고 선언했기 때문이다.” (1권 pp.259-260)
6. 사면과 그 의미
“분열된 국가를 일치단결시키고 의회를 재심 찬성의 방향으로 변화시켰으며 결국 극우에서 사회주의자에 이르는 완전히 이질적인 집단을 화해시키도록 도와준 신은 바로 1900년의 파리 박람회였다. … 의회의 정서를 드레퓌스에게 유리하도록 변화시킨 것은 결국 박람회가 보이콧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 의회는 드레퓌스 옹호자가 되었다. 그것이 궁극적 결말이었다. 물론 그것은 클레망소에게는 패배였다. 그는 최후까지 애매모호한 사면과 심지어 더 애매모호한 특사를 비난했다. 졸라는 이렇게 썼다. “이루어진 것이라고는 명예로운 사람과 폭력배를 악취 나는 사면으로 일괄 처리한 것이다. 모든 게 한 단지 속에 던져졌다.”” (1권 pp.261-262)
“몇 달 후인 1900년 5월 박람회의 성공이 확실시되자 드디어 진실이 밝혀진다. 이 모든 유화 정책은 드레퓌스파를 희생시킨 대가였다. 차후의 재심에 대한 제안은 425 대 60으로 기각되었으며, 1906년 클레망소의 정부도 상황을 바꾸지 못했다. … 그러나 클레망소의 패배가 교회와 군대의 승리를 의미하지는 않았다. 제정 분리와 교구 교육 금지령은 프랑스에서 가톨릭 교회의 정치적 영향력을 종식시켰다. 이와 비슷하게 정보 업무를 국방부, 다시 말해 행정 당국의 소관으로 일임함으로써 군대가 내각이나 의회에 공갈과 협박으로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게 막았다. 또한 자기 이익을 위해 경찰의 취조 업무를 할 수 있던 권한을 박탈했다.” (1권 p.262)
“대립하던 양 진영은 모두 법의 외부에 자리잡게 되었고, 그 결과 유대인 문제와 정치적 가톨릭주의는 그때부터 실질적인 정치의 장에서 추방되었다. 19세기의 지하세력들이 기록 역사의 조명을 받는 계기가 되었던 유일한 에피소드는 이렇게 끝이 났다. 유일하게 가시적인 성과는 그것이 시온운동을 탄생시켰다는 사실이다—시온운동은 반유대주의에 대항하여 유대인이 발견할 수 있던 유일한 해답이었고, 자신들을 세계적 사건의 중심에 세웠던 적대감을 심각하게 고려한 유일한 이데올로기였다.” (1권 p.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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